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명 6/등장 문명/로마 (문단 편집) === [[율리우스 카이사르]] === ||<-3> [[파일:civ6 rome color2.png|width=40]][br]{{{#f7d801 {{{+2 '''율리우스 카이사르'''}}}[br]'''Julius Caesar'''}}} || ||<-3> [[파일:카이사르(문명 6).jpg|width=100%]] || ||<-3> '''인용문''' || ||<-3>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br](Veni, vidi, vici)[*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카이사르의 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항목]] 참고. 다만 담당 성우는 "베니, 비디, 비치" 로 읽었는데 이건 교회 라틴어고, 고전 라틴어로 읽으면 "웨니, 위디, 위키" 다.] || ||<-3> '''소개''' || ||<-3> 카이사르 만세! 로마의 장군이자, 귀족이자, 독재자시여, 당신의 백성과 야망이 시대를 초월하여 당신을 부릅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당신의 원수든 가장 친한 친구든, 그 누구도 당신의 이상을 가로막게 두지 마십시오. || || '''지도자 특성''' ||<:>[[파일:율리우스 카이사르.png|width=50]][br]'''[[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525252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br](Veni, Vidi, Vici)''' ||처음 도시를 정복하거나 야만인 전초기지에서 금을 얻을 때 금 +300을 얻습니다. 주조 연구 완료 후에는 금이 500이 되며, 강철 연구 완료 후에는 700이 됩니다(일반 속도 기준). 야만인을 대상으로 할 때 전투력 +5를 받으며 항상 일반 경험치를 얻습니다.|| || '''안건''' || '''[[갈리아 전쟁|{{{#525252 갈리아 전쟁}}}]][br](Gallic Wars)''' ||야만인을 증오합니다. 야만인 전초기지를 처리하는 문명을 좋아합니다. 야만인 전초기지를 무시하는 문명을 싫어합니다.|| ||||||<:>{{{#!folding [ 역사적 배경 펼치기/접기 ] 이후 나타날 모든 독재자 후보의 본보기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존의 과두제에 대항할 권력을 쟁취할 수단으로 시민과 군대의 지지를 일궈낸 군인이었습니다. 카이사르의 부상은 로마 공화국의 종말이자 제국의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율리아 씨족은 대개의 귀족 가문이 그렇듯 비너스 여신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하지만, 그리 대단한 가문은 아니었습니다. 비교적 오래전에 귀족, 즉 평민의 반대 의미로서 귀족 계급에 올라갔지만, 로마 공화국에 있어서는 사소한 일이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야기는 기원전 85년에 그가 가장이 되면서 시작됩니다. 카이사르는 가장이 되자마자 그의 친척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술라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서 승리한 술라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얼마 안 되는 유산과 유피테르의 사제직을 모두 잃었습니다. 거의 빈털터리가 된 카이사르는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그 선택은 극적인 결과를 낳게 될 터였습니다. 카이사르는 군 경력 초기에 에게해의 해적에게 붙잡힌 일이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해적들과 친구가 되어 더 많은 몸값을 부르라고 부추겼고, 풀려나면 그들을 추적하여 깡그리 없애버리겠다고 농담처럼 얘기했습니다. 해적들은 카이사르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카이사르는 농담으로 한 위협을 즉시 실행에 옮겼습니다. 초기에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부패에 반대하고 군대를 좋아하는 인물로 유명했습니다. 기원전 59년, 집정관에 당선되고 '삼두정'의 일원이 된 카이사르는 계급이 오르면서 일반 시민에게 호의를 베풀어 토지 재분배를 밀어붙이며 갈등이 벌어지면 자기 병사들과 함께 귀족을 위협했습니다. 그 덕분에 카이사르에게는 적들이 생겼고, 그는 보복을 피하고자 정세가 어수선한 갈리아 지역의 총독직을 확보했습니다. 이 행위 또한 그의 미래를 결정하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전쟁은 곧 기회입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에서 암비오릭스를 포함한 갈리아 군대를 가차 없이 밀어붙였습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로마를 떠나 있는 동안 그의 정적들은 집정관 선거에서의 부정을 빌미로 삼아 카이사르의 지지 세력을 적극적으로 공략했습니다. 한때 동맹이었던 폼페이우스는 단독 집정관이 되었고, 원로원에서는 두 사람에게 무장을 해제하고 법질서를 재건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둘 다 그 말을 따르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에서 승전한 군단병을 돌려 로마로 진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거기 루비콘강이 있었습니다. 로마 본토에서는 군대 활동이 금지됐으며 루비콘강을 건너는 것은 적대적 행동의 신호였습니다. 카이사르는 루비콘강 앞에 잠시 멈춰 'alea icata est(알리아 이악타 에스트)', 즉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선언했습니다. 카이사르는 강을 건넜으며,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습니다. 내전이 발발했지만, 카이사르의 군사 기획은 적인 폼페이우스를 압도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그를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을 거쳐 그리스까지 추격했습니다.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독재관에 임명되었습니다. 후대의 독재자들이 모방하게 될 행동이었습니다. 권력을 통합하는 것이 다음 조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속임수와 위협을 교묘하게 섞어서 원로원을 겁먹게 했고, 이집트에서는 그의 연인이 된 클레오파트라를 대신하여 개입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카이사르는 공적으로는 서민을 우대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장인 길드와 법률 개혁 양쪽 면에서 귀족이 아닌 사람들의 권력을 제한했습니다. 로마의 확장에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카이사르는 어느 정도의 분권을 허용하여 이탈리아 너머까지 법적 권리를 확장했으며, 지방 도시에 그들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통치하도록 더 많은 자유를 허용했습니다. 카이사르의 독재 정권은 원로원에서 부여한 새로운 법적인 권한은 물론, 비공식적인 협박(카이사르는 간단히 원로원의 움직임을 여러 개 거부했습니다)에도 의존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원로원의 권력이 심각하게 흔들린 것처럼 보입니다. 적들이 카이사르를 상대로 음모를 꾸며도 놀랄 일은 아니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카이사르가 연설하기로 한 원로원 회의에서 카이사르는 23번 칼에 찔렸는데, 그중에는 그가 친구라고 생각했던 브루투스도 있었습니다. 흔히들 셰익스피어의 'et tu, brute(에 투, 브루트. 브루투스 너마저)'로 알고 있지만, 카이사르의 마지막 유언은 그리스어로 'kai su, teknon(카이 수, 테크논)', 즉 '아이야, 너도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 로마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카이사르는 여전히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이제 그 책임을 질 자는 카이사르의 장군 안토니우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를 꿈꾸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도망쳐야만 했습니다. 동시에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통치권을 주장했고, 그에 따라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카이사르의 암살자는 물론, 클레오파트라에게로 도망쳤던 안토니우스까지 쫓기다 죽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가 되려고 할 때였습니다. 카이사르의 유산은 대담한 야망뿐 아니라 군사력과 결합된 민중주의의 힘도 강화했습니다. 나폴레옹, 볼리바르와 같은 황제 지망생은 카이사르에게서 영감을 얻었고 자신을 '카이저'나 '차르', '카이사르'라고 칭하는 군주들은 카이사르의 이름을 원하는 만큼 마음대로 차용했습니다. }}}|| 모델링과 모션이 잘 뽑힌 편이다. 벌써 모드용 지도자로 쓰겠다는 모더들이 우후죽순. 다만 성우가 발음 고증을 못 살렸다.[* Ceaser 를 로마식 발음이 아니라 영어식으로 '시저'로 발음하는 등. 정작 기존 트라야누스는 멀쩡히 카이사르로 읽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